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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실제인물 황기환 유해, 고국 도착… '독립된 조국에서, Welcome Back'

by 조이풀마이라이프 2023. 4. 10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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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스터션샤인 유진 초이 / 실제 모델 황기환 애국지사

 

'독립된 조국에서 See you Again'… 현실이 되다

  •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관으로서, 일제강점기 국외에서 활동하다 미국 땅에서 숨을 거두셨던 황기환 애국지사
  • 뉴욕 한인 교회, 황기환 애국 지사 추모식 개최 후 교민들이 유해를 운구차량에 안치/국내로 봉송하는 행사 진행 
  • 뉴욕에서 출발, 4월 10일 오전 9시 대한항공 KE086편 인천공항 도착
  • 보훈처장 및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직접 공항에서 유해 영접: 이회영 선생의 후손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, 김구 선생의 후손 김미 백범김구재단 이사장, 윤봉길 의사의 후손 윤주경 국회의원, 김좌진 장군의 후손 김을동 전 국회의원, 안중근 의사 가문의 후손 안기영 선생,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목사의 후손 손명원 선생, 독립유공자 윌리엄 린튼의 후손인 인요한 보훈정책자문위원장 등
  • 운구 차량을 통해 대전현충원으로 이동, 현충탑 앞에서 유해 봉환식 거행 후 독립유공자 7묘역에 안장

 

 

황기환 애국지사 유해

 

 

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­… 길었던 여정 

 

 

 

 

감사합니다 (출처: 뉴시스)

  • 1995년 대한민국 정부, 황기환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
  • 2013년, 국가보훈처가 황기환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작업 시작, 그러나 미국법에 따라 승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뤄졌음 
  • 2018년 드라마 '미스터 션샤인'으로 인해 황기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짐.
  • 2019년 9월 28일,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로 결정했지만, 서류에 문제가 있어 계속 미뤄졌음.
  • 2023년 4월 10일,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,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음 

 

 

황기환 지사의 일생 

  •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'유진 초이'의 실제 모델이지만, 자세한 사항은 다름 

출생과 미국

  • 황기환은 1888년(고종 25년) 한성부(현 서울 특별시)에서 태어남
  • 그의 가계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음
  • 1904년 하와이에 입항, 미국에서 6년간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 부회장으로 활동
  • 특정 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기록은 없어서 독학으로 학업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

 

'미국인' 이 된 경위 

  • 1917년,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그는 유럽전선으로 파견되어 기독교청년회 소속으로 미국 병사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담당함.
  • 1918년 5월 9일, 개정된 징집법으로 인해 전쟁 때 군복무를 하는 미국인은 미국시민이 될 수 있게 됨.
  • 세계대전 종식 후, 프랑스 파리에 남아있던 중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1919년 6월 3일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임명됨.
  • 황기환의 미군 복무와 함께 파리의 한국대표부에 합류했고, 중국신문 <신민일보> 1919년 8월 14일자 기사에도 이 사실이 보도됨

 

그의 독립 운동 활동 

  •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표부의 일원으로서, 대유럽 홍보 활동 및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꾀함.
  • 1919년 8월 23일 프랑스 신문 <라 프티 르프브리크>와 인터뷰하여, 일본의 철수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권한 이양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함.
  • 김규식은 1919년 8월 25일 워싱턴에 도착한 직후 구미위원부를 설립하고 위원장에 선임되고, 황기환은 정식 서기장으로 임명되고 유고시 위원장 직무를 대리함.
  • 2월 11일, '뉴욕 헤럴드' 파리지부와 인터뷰, "한국문제가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, 한국인들의 요구는 절대 독립으로 어떤 강압도 꺾을 수 없다."
  • 1920년 9월 2일,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.
  • 런던과 파리에서 대유럽 홍보활동을 전개하며, 1920년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'한국독립안' 토론 요구 전보를 보냄.
  • 5월에는 잡지 <자유한국> 제1호를 프랑스어와 영어로 발행.
  • 황기환은 국내 인사와도 연락을 시도하며, 1921년 8월에는 소책자 <영일동맹과 한국>을 준비하고 있었음.
  • 1921년 4월, 일본 황태자 히로히토 방문과 관련해 런던경찰국에 소환당한 황기환은 일본대사에게 항의 서한을 보내고, 언론사들에게 항의서를 보냄.
  • 1921년 6월 12일, 대영제국 식민지수상회의 참석자들에게 '일본의 통치를 벗어나고자 하는 조선사람의 청원' 인쇄물을 배부하며 일본대사에게도 보냄.
  • 1921년 6월 23일, 프랑스의 한국친우회 결성식에 참석한 황기환은 서툰 프랑스어로 "독립이 아니면 죽음을"이라는 짤막한 연설을 하였음.
  • 한국인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노력: 1919년 프랑스에서 50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오기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으며, 프랑스로 이송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 (200명 중 35명은 프랑스로 이송되어 공장에서 일하게 됨)
  • 한국인 노동자들은 '재법한국민회'를 조직하였으며, 황기환은 일자리 알선 및 후원을 함.

 

 

황기환의 사망 

  • 1923년 4월 18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, 퀸즈 메스패스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

 

 

 

감사합니다. 조국에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.


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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